매년 8월 14일은 택배업계와 고용노동부가 2020년부터 택배 노동자의 휴식 보장을 위해 만든 '택배 없는 날'이다. 공동선언문 형식의 사회적 합의일 뿐이라 법적 구속력은 없다지만, 대부분의 택배사들은 매년 동참을 해왔다 한다.
뉴스를 찾아보니 자체 배송망을 갖춘 쿠팡, SSG닷컴, 마켓컬리와 편의점인 GS25, CU는 평소대로 쉬지 않고 배송을 한다고 한다. 그중, 특히 쿠팡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에 동참하라는 택배업계의 목소리가 높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택배를 받는 날이 받지 않는 날보다 많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쿠팡 와우 회원이다. 약간의 비용을 내서라도 내 택배를 빠르게 받아보겠다는 심산이다.
아침에 주문하면 밤에 오기도 하고, 밤 12시 전에만 주문하면 새벽 도착을 보장한다. 이 얼마나 (물건) 살 맛 나는가.
물론 쿠팡만 이용하는 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쇼핑몰이 당일 발송, 다음날 도착을 보장하니까.
그 결과, 집순이인 나의 집과 사무실 문앞에는 거의 매일 택배 봉투와 상자가 놓여있다.
쇼핑의 방식도, 배송도 이렇게나 빠르고 편리해진 세상. 하지만, 그 편리함 뒤에 택배 노동자들의 엄청난 노고가 숨어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뉴스를 통해 그들 일부의 사망 소식을 듣기 전까진.
택배 노동자의 노동 강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아닐까?
한동안 쏟아졌던 뉴스를 떠올리고,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계절은 여름이다. 차 안은 마치 찜질방처럼 덥고, 바깥은 더 덥다. 그 무거운 택배 상자들을 날라야 하는 일이 하루에 수십, 수백번 반복된다.
사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몇 시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에 땀이 흐르는데. 특히 요즘 같은 날씨라면...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이라면... 어휴, 난 못 해.
진절머리를 내며 계절을 바꿔 상상해본다. 추위는 그나마 몸을 움직이며 떨칠 수 있겠지만, 눈이 와도 비가 와도 태풍이 와도 오늘 배송하기로 한 배송 건은 정해진 시간 내에 해내야 한다.
쉴틈 없이 배송 중인데도 언제 도착하냐는 고객의 항의 문자가 빗발친다. 응답할 시간도 없다. 쫓기듯 뛰어다니고 페달을 세게 밟는다. 길은 왜 이리 미끄러울까. 어휴... 역시 난 못 해.
눈을 뜨니 보인다. 난 못 하는 걸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땀방울이. "택배 없는 날"이 법적 구속력이 없다 하여 사회적 합의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정당 할 수 있는지.
나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택배를 받으며, 그들의 노동 강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나를 구하러온 나의 '택배 기사님'
몇 주 전, 엄마의 칠순 파티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온라인으로 주문을 했다. 사실 거의 닥쳐서 급하게 준비를 했는데(엄마 미안), 그 중 현수막의 도착 예정일이 바로 칠순 당일이었다.
그래도 평소 빨리 배송을 해주는 택배사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엄마 칠순 당일 아침 택배사로부터 온 안내 문자에는 "18시~21시 배송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정작 파티룸을 오후 4시로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안내 문자를 받고 난 후, 고민하던 나는 담당 택배기사님께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사실 이런 문자를 보내는 것도 기사님을 귀찮게 하는 것 같아 걱정이 컸다. 와서 가져가라 한들 기사님은 배송 순서가 아닌 내 물건을 찾기 위해 한참을 택배 더미를 뒤적일텐데.
바쁘시니 확인이 늦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놀랍게도 기사님은 이내 '1시 전에 배송 갑니다'라는 답장을 주셨다. 그 순간 얼마나 큰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이 동시에 솟구쳐 올랐는지!
뭐라 답장을 드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그날이 마침 복날(중복)이기도 해서, 치킨 기프티콘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달했다.
그리고 나서 '1시까지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생각 하고 다른 이벤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게 웬걸? 오전 11시가 좀 넘어서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택배사 안내문자보다 무려 7시간, 기사님이 말씀하신 시간보다 2시간 가까이 당겨서 배송해 주신 거다. 내가 경험한 이 배송의 기적은 치킨의 힘(?)이었을까, 택배 기사님의 측은지심이었을까.
무더운 한 여름의 가운데에서 어떻게 동선과 일정을 조정하셨는지 나야 모르지만, 분명 바쁘신 와중에도 나의 사정을 고려해서 배송을 서둘러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칠순 현수막이라니, 이건 못 참지!' 느낌이었달까.
아무튼 난 이 기사님 덕분에 엄마의 칠순 잔치를 성공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하고 말씀드리는데, 제가 쓴 글을 보고 택배 기사님한테 맘먹으면 예정시간보다 빨리 올 수 있는 거 다 안다고, 빨리 와달라고 채근하지 마세요. 채근 할거면 당신도 BBQ 황올반반+콜라 세트 기프티콘 보내고 해....
'택배 기사도 사람'이니까
그렇다. 요약하면 택배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배송하는 거였다. 안내된 시간에 문 앞에 와있는 택배는 제 발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기사님께 보낸 기프티콘은 그날 바로 사용되었다.(카카오톡 기프티콘 사용 여부는 선물함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걸 보고 나니 더욱 기뻤다.
퇴근 후 치킨을 뜯으며 재미난 영화나 드라마 보고있는 택배 기사님을, 또는 치킨 봉투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며 "아빠 왔다~"를 외치고 있는 택배 기사님의 모습을 내 맘대로 상상했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 누군가의 귀한 가족인 그 사람을.
택배 없는 날, 그거 하루쯤 참을 수 있다
최근에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택배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처럼 개인 연락해서 사정 봐달라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할까 등등.
그래서 오늘 뉴스에서 본 '택배 없는 날'이 새삼 반갑다. 많은 택배 노동자들이 오늘 하루 쯤은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길. 또는 그동안 못갔던 병원에 가서 아픈 곳을 치료 받을 수 있길 바란다.
택배 하루 안 받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 아니, 오히려 세상이 무너져야 비로소 택배가 멈추지 않을까. 물론 확률적으로 그럴 일은 적을테니,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1년에 오늘 하루 쯤은 참아보자는 얘기다.
오늘 하루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주문을 미루고, 조만간 택배 기사님들께 전할 감사의 메시지를 작성해 보는 건 어떨까?
"택배 없는 날"은 단순히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택배 노동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첫걸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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